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립 마운트배튼 (문단 편집) ==== 영국으로 귀화하다 ==== 필리포스와 엘리자베스가 친하다는 것을 알게 됐을 때, 필리포스의 가족들은 매우 큰 관심을 가졌다. 가족들은 필리포스가 영국 해군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영국으로 귀화하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. 사촌 [[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|켄트 공작부인 마리나]]는 필리포스의 영국으로의 [[귀화]]는 매우 좋은 생각이며, 해군 커리어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공주와의 결혼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.[* Duchess of Kent to Louis Mountbatten 28 January 1945 "I think it is a very good idea & apart from it being a help in his naval career it might also be an asset for other 'matters'." Of course the less said about the question we have sometimes discussed the better - & as you say it must take its course.] 필리포스의 귀화를 위해 외삼촌 [[루이 마운트배튼]]이 매우 많은 노력을 했다.[* 루이 마운트배튼은 조카가 영국의 후계자와 결혼한다는 생각에 매우 들떠했다. 그는 야망이 컸고 가계도와 결혼 중매에 관심이 많았다. 1930년대에 친구 [[에드워드 8세]]를 위해 (33세부터 15세까지) 18명의 결혼 가능한 유럽의 공주들 목록을 만들었다고 한다.] 먼저 영국의 [[조지 6세]]의 허락과 그리스의 [[요르요스 2세]]의 허락이 필요했지만, 두 군주 모두 기꺼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. [[요르요스 2세]]의 입장에서 귀화는 다른 나라에게 자국의 왕자를 빼앗기는 굴욕적인 상황처럼 보여질 수도 있었으며[* 당시 남성 왕족이 얼마 없었던 그리스 왕가에서 필리포스는 의외로 계승서열 3위인 왕족이었다.], 조지 6세의 경우에는 마운트배튼의 의도가 해군 커리어 뿐만 아니라 자신의 딸과의 결혼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. 실제로 조지 6세는 일기에 "필리포스의 귀화는 결혼과 관련 있을 것 같다."고 적었다. 두 군주들이 허락을 꺼렸고 영국 정부에서도 필리포스의 귀화로 발칸 반도의 정치 상황에 기어들까 조심스러워 했다. 결국 필리포스의 귀화는 3년이 걸렸다. 그동안 루이 마운트배튼은 여러 곳에 로비를 하는 등 이 일에 열과 성을 다했다. 조지 6세가 필리포스의 귀화를 허락하자, 루이 마운트배튼과 요르요스 2세는 앨리스 왕자비에게 필리포스가 영국 시민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해 줘 감사 인사를 하라고 했다. 앨리스 왕자비는 조지 6세를 찾아가 감사 인사를 전했고 조지 6세는 요르요스 2세가 자신에게 기다리라고 해 허락이 늦어졌을 뿐이라고 했다. 앨리스 왕자비는 조지 6세와 요르요스 2세 모두에게 온전히 승인을 받았음을 확인했다.[* 덕분에 들뜬 루이 마운트배튼은 [[앨버트 공]]의 사례를 찾아보며 벌써부터 설레발을 쳤다.] 이후에도 앨리스 왕자비와 외할머니 빅토리아, 이모 [[루이즈 마운트배튼|루이즈 왕세자비]]가 함께 [[버킹엄 궁전]]에 방문해 왕과 왕비와 상의하는 등 사실상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오갔다. 필립은 귀화로 새로운 성이 필요했다. 아버지 안드레아스 왕자의 가문 이름은 슐레스비히-홀슈타인-존더부르크-글뤽스부르크로 올덴부르크 가문의 분가였기 때문에 올드캐슬(Oldcastle)이라는 성을 추천 받았다. 하지만 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필리포스는 어머니 가문의 성 마운트배튼(Mountbatten)[* 마운트배튼은 외가인 바텐베르크 공가의 성을 영문식으로 읽은 것으로, 1차대전 중 반독 감정으로 개명한 것이다. 단,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는 그 훨씬 전에 결혼했기 때문에 한번도 '마운트배튼'이었던 적이 없었다.]을 사용하기로 했다. 1947년 5월 18월, '''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필리포스'''는 '''필립 마운트배튼''' 대위로 영국에 귀화했다. 아울러 '''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신분과 계승권'''[* 필립의 계승권은 당시 그리스 왕가에서도 매우 높은 3위였다. [[살리카법]]을 채택하고 있던(1952년 폐지) 그리스의 국왕은 필립의 사촌형인 [[요르요스 2세]]였는데 그는 자녀가 없었으며(1921년 결혼했지만 자녀 없이 1935년에 이혼했고, 필립의 영국 귀화 직후인 1947년 4월 1일 동맥경화로 급서), 요르요스의 동생이자 후임 국왕인 [[파블로스]]도 아들이 [[콘스탄티노스 2세]]뿐이었으며, 둘째 백부 요르요스 왕자는 80살을 바라보는 고령이었고, 그의 외아들 페트로스는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포기한데다 자녀 없이 사망, 셋째 백부 니콜라오스 왕자는 딸 셋만 두고 이미 사망, 이미 사망한 숙부 크리스토포로스 왕자의 외아들 미하일이 있었지만 슬하에 딸만 둘을 두어서 여기도 단절됬다.]'''을 포기'''함과 동시에 종교도 [[동방정교회]]에서 [[성공회]]로 개종[* 여태껏 가족이나 친구들과 성공회 [[감사성찬례]](예배)를 드렸으나, 군에 있을 때 세례는 [[그리스 정교회]]식으로 받았다고 한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